2025년 기독교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 (파트 2): 

뿌리에 대한 교회의 거부

지난 주에 우리는 로마서 11장 7-19절을 마무리하며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이스라엘에 대한 위대한 부흥과 부흥의 비전, 그리고 그 영향력이 이스라엘과 이방 세계에 미칠 영향을 다뤘습니다.

 

로마서 11장 19-33절을 읽으며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로마서 11장 19-33절 (AMPC)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말하리라. 가지들이 꺾인 것은(가지치기 된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 말이 옳도다. 그들은 믿음의 부족(진정한 믿음의 결여) 때문에 잘려나갔고, 너희는 믿음으로 인해(믿기 때문에) 굳건히 서 있느니라. 그러므로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오히려 경외와 두려움으로 서라.

하나님이 원래의 가지들을(불신앙 때문에) 아끼지 않으셨다면,

너희도 같은 죄를 짓는다면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나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인자가 있느니라-너희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고 친절하심이 머물러 있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잘려나갈 것이다(가지치기될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전하는 계시에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1. “은혜.”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crestotes(크레스토테스)’로, 도덕적으로 유익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의 백성에게 창조된 덕목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강력한 선함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고 성령에 의해 전달되며, 영원히 송축받을 은혜의 풍성한 모습을 그려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계시되더라도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성숙도에 따라 그 계시의 수준이 제한됩니다.

이것은 다음과 대비됩니다:

 

  1. “엄격함.”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apotomia(아포토미아)’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목적에 반대되는 것을 단호히 끊어내는 엄격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엄격함이 아니라 성결을 지키고, 언약의 기준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순결을 보존하는 의로운 단호함입니다.

이들 두 용어: 자비와 엄격함은 도덕적 일치를 이룹니다. 자비는 구원을 제공하며, 엄격함은 지속적인 불신앙을 내리칩니다. 이 긴장은 은혜가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며, 그의 자비 속에서 계속할 때 경건한 인내를 촉진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며 계속 읽어나가고,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영원한 위치를 확인하십시오.

로마서 19:23-33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들(떨어진 가지들, 유대인들)도 불신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자연속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나온 가지가 인공으로 재배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다면, 잘린 원 가지를 그들 자신의 올리브나무(원래 부모 나무)에 다시 접붙이는 것은 얼마나 더 쉬울까요?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이 (자기 자랑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이 숨겨진 진리와 비밀을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일부에게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일시적으로) 굳어짐(감각 상실)이 임하였으니, (이는 은혜와 엄격함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건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제거할 때 그들과 맺을 내 언약(약속)이다’ 함과 같습니다.

복음(좋은 소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현재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는 당신들에게 유익과 이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신적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조상들 때문에 여전히 사랑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한번 주어진 것은 결코 거두지 않으시며, 은혜를 베푸신 자나 사명을 위해 부르신 자에 대해 마음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대들이 한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했지만,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대들이 (그분의) 은혜를 얻었듯이, 

그들이 지금 (그대들이 은혜를 받는 동안) 불순종하고 있지만, 그들도 여러분들이 누리는 은혜를 통해 언젠가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여러분들에게 보여진 은혜를 그들이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사자인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의 부요함과 지혜와 지식의 깊이여! 그분의 판단(결정)은 얼마나 측량할 수 없고(알 수 없고, 탐구할 수 없고) 신비로운 것입니까! 그분의 길(그분의 방법, 그분의 길)은 얼마나 추적할 수 없는(신비로운,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포도나무의 줄기에 접붙여져 뿌리인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들의 혈통을 통해 온 언약이 오늘날 이 시기에 우리에게 열려 있는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줄기와 뿌리가 없다면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뿌리가 천국에 들어가도록 열렬히 사랑하고 기도함으로써 그 뿌리를 양육하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뿌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제 집 앞에 복숭아 나무가 있습니다. 몇 년 된 나무입니다. 제가 심고 키운 나무가 열매를 맺기 시작했을 때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첫 해에 나무의 반쪽에서 복숭아가 열렸습니다. 그 복숭아는 제가 먹어본 복숭아중 가장 맛있었습니다. 다람쥐와 저는 그 복숭아를 두고 계속 다퉜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다른 반쪽은 쓴 열매를 맺었습니다. 너무 쓴 열매라 매년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그 나무를 몇 년 동안 돌보아 왔는데요. 이제야 그 나무가 건강하고 성숙한 나무의 줄기에 두 종류의 복숭아 품종을 접목한 나무란걸 깨달았습니다. 이 가지들은 접목체입니다. 하나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복숭아로 자랐고, 저와 그 다람쥐가 영원히 다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접목체는 나쁜 접목으로 쓴 나무로 자랐습니다. 다람쥐들은 그쪽 나무 열매는 아예 건드리질 않습니다. 언젠가 그 나쁜 접목 부분을 완전히 잘라내고, 그 부분에 다른 과일나무 가지를 접목시키려고 합니다.
친구들이여,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뿌리인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거나 친절을 베풀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기독교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적은 수세기 동안 두 그룹 사이의 증오와 적대감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는 속임수를 만들어 왔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항상 갈등하며, 그들을 나누는 깊은 쓴 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혈통입니다. 이 분열은 영원히 지속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질투하게 만들기 위해 접붙여졌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박해하고 거부하며 지속적으로 멀리 밀어낸다면, 어떻게 그들을 질투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그들의 메시아로부터 더 멀리 밀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위대한 분열: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우리 주님의 죽음, 장사, 부활, 승천 이후 발생한 분열에 대해 읽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 지도자와 로마인들에 의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기독교인, 특히 가톨릭 교회와 유대인 사이의 관계는 신학적 갈등, 정치적 긴장, 심지어 공개적인 적대감으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한 관계였습니다.

 

이 큰 분열로 이어진 역사적 순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초기 교회 (2세기-4세기)

2) 저스틴 순교자(100-165 AD). 2세기 변증가이자 철학자. 그는 저서 《트리오와의 대화》에서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이 더 이상 독특한 계약적 역할을 갖지 않는다고 암시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하나님의 언약의 영원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3)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4세기 가톨릭 사제 – 그는 유대인들이 기독교 진리의 ‘증인 민족’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유대인의 언약이 성취되었고 따라서 기독교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대체 신학’을 지지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체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뿌리입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데올로기는 이후 중세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체 신학은 기독교,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 많은 교파에서 핵심 교리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유대인을 주변화하는 신학적 태도의 확산으로 이어졌고, 일부 경우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나 적대감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1. 중세 교회와 반유대 정책 (11세기–15세기)
  2. 중세 기간 동안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 기관이었던 가톨릭교회는 유대인 공동체를 예수 살해 혐의(데시데)와 연관시켜 기독교 신앙의 적대자로 묘사하는 정책과 교리를 자주 시행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코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 공동체에게 교회를 통해 내려진 이 처벌은 우리를 더욱 분열시키는 데만 기여했습니다. 이 역사적 기간 동안 일부 독특한 분리 운동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 하에서 공의회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과 구분되도록 독특한 옷을 입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유대인을 외부인으로 보는 시각을 반영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차별을 초래했습니다.

 

  • 피의 모함: 이는 유대인에 대한 끔찍한 거짓말로,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를 종교적 목적으로 살해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어린이가 실종되면 근처 유대인들이 재판이나 철저한 조사 없이 자주 비난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와 공동체는 때로는 이러한 거짓 주장을 지지하거나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폭력과 끔찍한 포그롬을 유발했습니다. (포그롬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유럽에서 일어난 일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의미합니다. 이는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심각했습니다.)

 

  •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 기간(11세기~13세기)에 기독교 열성파들은 교회로부터 암묵적 또는 명시적인 승인을 받아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를 공격했습니다(예: 1096년 라인란트 학살에서 인민 십자군에 참여한 프랑스와 독일 기독교인 무리가 유대인에 대한 대량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교회에 의해 직접 기획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종교적 선동으로 인해 촉발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과 사건은 반유대주의 감정을 고착시켜 광범위한 박해, 강제 개종(개종하지 않으면 죽음), 추방으로 이어졌습니다. 1290년 잉글랜드, 1306년 프랑스, 1492년 스페인에서 강제 추방이 이루어졌습니다.
3) 마틴 루터와 종교 개혁 (16세기, 21세기까지 영향을 미침)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인 마틴 루터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그의 개혁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유대인들에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1543년 저서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에서 루터는 유대인들에 대한 엄한 조치를 옹호했으며, 그 결과 회당 소각, 책 압수, 기독교 지역에서의 추방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그리스도를 부인했기 때문에 버림받고 정죄받은 자들”로 묘사했습니다. 루터의 글은 프로테스탄트 지역, 특히 독일에서 반유대주의적 태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나중에 나치 선전가들에 의해 악용되었습니다.

4) 교파별 교회들의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반대 (20세기–21세기)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일부 기독교 교회와 지도자들은 신학적 반대, 팔레스타인 권리에 대한 정치적 우려,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비판 등을 들며 이스라엘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주요 사례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카톨릭 교회의 이스라엘 인정 지연 (1948–1993)

바티칸은 역사적으로 시온주의를 가톨릭 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해 왔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결과로 보는 신학적 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티칸은 1993년까지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며, 이는 신학적 우려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포함한 지정학적 고려사항에 의해 형성된 신중한 태도를 반영합니다. 교회는 또한 거룩한 땅(Holy Land)에 있는 기독교 성지와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을 우선시했는데, 이 중 많은 곳은 1948년 이전에 아랍이나 무슬림의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방어적으로 말하자면, 바티칸의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0년대) 이후 완화되었는데, 그 내용은 예수 죽음에 대한 유대인의 집단적 책임을 거부하고 엄격한 대체 신학(replacement theology)에서  벗어나기 등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피해를 입었습니다.

– 주류 개신교 교회의 시온주의 비판 (20세기–21세기)

먼저, 시온주의란 무엇인가? 이는 유대 민족이 조상들의 고향인 이스라엘 땅에서 자결권과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운동입니다.

 

일부 개신교 교파, 특히 주류 교회(예: 미국 장로교, 연합 감리교, 연합 기독교 교회)는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해 왔으며, 팔레스타인 인권과 서안 지역 및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우려를 자주 언급해 왔습니다. 시온주의는 현재 이스라엘에 위치한 유대인 국가의 설립, 발전, 보호를 위한 운동입니다. 1897년 테오도르 헤르츨 아래 정치적 조직으로 설립되었으며, 이후 차임 와이즈만(Chaim Weiszmann)이 이끌었습니다. 시온주의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장소를 준비하기 위해 일으킨 운동입니다.

 

  • 미국 장로교(2004–현재): 교회는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이익을 얻는 기업들에게 투자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이는 인권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반대로 해석됐습니다.
  • 스코틀랜드 교회 (2013): 보고서 《아브라함의 유산》은 시온주의의 신학적 근거를 비판하고, 이는 기독교의 ‘약속의 땅’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비판 이후 보고서는 수정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주장에 대한 회의론을 반영했습니다.
  •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이 단체는 이스라엘 정착지를 지지하는 기독교 시온주의를 비판하며, 이를 불법적이고 평화에 해로운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친이스라엘 단체들은 이러한 입장들을 ‘반이스라엘’로 해석했지만, 교회들은 자신의 행동을 “정의와 평화”를 옹호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의 존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가 언급한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인 성경적 신앙에서 벗어나 19세기 초 성경 학교에 침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고, 이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많은 주류 교회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적 정의보다 사회적 정의를 옹호합니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자유 해방 이념)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기독교 교리는 현대 지식, 과학, 윤리와 조화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은 디모데후서 3:16-17에서 언급된 다음의 내용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것이며, 교훈과 책망과 죄의 깨달음과 잘못의 교정과 순종에 대한 훈련, (그리고) 의로움(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각과 목적과 행동으로 거룩하게 사는 것)에 대한 훈련에 유익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고 능숙하며, 모든 선한 일에 적합하고 완전히 준비된 자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며, 우리의 교훈, 책망, 죄의 깨달음, 의로움의 훈련을 위해 주어졌고, 하나님의 사람을 모든 선한 일에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더 이상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성경의 신성과 신적 영감을 박탈하고, 성경에 속임수의 역사적-문화적 이데올로기를 적용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옹호자들은 성경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닌 은유적 또는 상징적인 이야기의 모음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창조부터 홍해 분열,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오순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기적들에 대해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언약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과 권위를 상징적인 것으로, 영감을 주는 이야기들의 모음으로 희석시키고 이 개념을 현대 사회가 따를 지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회 정의, 문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혼합하고, 만약 예수님이 오늘날 거리에서 걸어다니신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스러운 정의보다 사회 정의를 선택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포용적이며, 오늘날 세상에서 만연하는 죄악된 생활 방식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성경 학교들은 이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여! 제가 언급한 교파들은 모두 동성 결혼, LGBTQ 생활 방식, 낙태 찬성, ‘기후 정의’,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성경의 가르침보다 우선시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 교파들의 타협은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 확산되고 있는 반유대주의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과연, 2025년 기독교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과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메시지를 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 이 시기에 우리의 오랜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가 필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3부작 시리즈에서 방탕한 아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비유처럼,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한 가지 이상의 영역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잃어버렸거나 끊어진 것을 찾았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요성에 대해 완벽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11-32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스라엘이나 유대 백성은 방탕한 아들과 같으며, 그들은 아버지께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며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그의 형제처럼 원망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하나님의 빛이 들어오도록 기도하며, 휘장이 찢어지도록 기도하고, 그들이 그들의 메시아를 알게 되도록 기도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중보기도자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에 참여해야 할까요? 심판의 자리에 섬으로써 축복의 기회를 놓친 역사와 실패의 결과를 보여주길 원하는가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것을 변명해야 할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럴은 지난 금요일 제가 이스라엘에 대해 첫 번째 메시지를 전한 후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 기억나는 첫 번째 일은 사람들이 저와 관련된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그들과는 무관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그들을 논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를 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간섭하려는 사람들이 제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싸움을 걸려고 했습니다. 한 관찰자가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개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목에 소 방울을 걸고 있는 여성과 비언어적 소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면이 바뀌었고, 저는 태그에 있는 코드를 스캔하고 누군가에게 전화번호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제 전화번호의 마지막 4자리는 통로를 찾는 위치를 의미했습니다. 깨어났을 때, 주님께서 에레미야 32장으로 저에게 메시지를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예레미야 32장에 있는 성경 구절을 찾았습니다. 37~44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너희가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없으며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산지의 성읍들과 저지대의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에 있는 밭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하여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꿈에서 저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며, 싸움을 걸려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적들을 상징합니다.  개입하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소 방울을 든 여성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소 방울은 목자의 양 떼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양을 알고 계시며, 그들을 제자리로 불러들이셨습니다.”

-끝-

 

지난 주에 말했듯이, 이스라엘이 국가로 탄생했을 때, 이는 말세의 사건들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사건들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세계가 이스라엘에 대해 얼마나 큰 적대감을 보이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물리적 방어선입니다. 아랍 국가들은 98-99%가 이슬람을 믿으며, 이스라엘과 미국의 멸망을 믿는 사람들이 현재 작은 국가인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 전체의 0.24%에 불과하며,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마지막 물리적 방어선이며, 교회는 우리가 종말의 사건에 가까워질수록 마지막 영적 방어선입니다.

캔디스(Candace)와 터커(Tucker)는 최근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서 저를 크게 실망시켰습니다. (이 주제는 2주 후 미디어의 이스라엘 보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한 사람은 고대 이스라엘과 현대 이스라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거짓입니다.
4500년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 따르면, 노아의 아들 셈은 살렘을 세웠고, 이를 다윗 왕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재탈환해 BC1070년에 예루살렘으로 개명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후손들 중 많은 이들이 오늘날 이스라엘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를 위해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알리야를 통해 그들을 불러들이고 계십니다. 박해가 강해지고 있는 게 보이시나요? 예언적 시간표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반유대주의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알리야를 선택할 것입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이 재점화되자마자, 사요 목사가 프레즈노로 왔고, 우리는 제 집에서 약 90분 거리에 있는 ‘크라이스트 포 더 네이션’ 시설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그들은 불완전한 과일을 건조시켜 전 세계로 배송합니다. 현재 그들은 곡물 운송업체와 계약을 맺어 곡물을 시설로 운송하며, 수프 등에 사용할 고영양 곡물 패키지를 만들어 컨테이너 단위로 빈곤 국가로 배송합니다. 그들은 시설로 안내해 이스라엘로 배송될 컨테이너를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영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반유대주의 박해를 겪은 많은 유대인 가정들이 이젠 강제로 추방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름다운건 그들이 알리야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컨테이너들은 가구, 이불, 식기류 등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정착할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비극을 통해 성경말씀을 이루고 계시고,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의 삶을 재건하고 보호할 수 있도록 물자를 운송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흥분해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날들

 

앞으로의 날들에 대해 여러분이 심사숙고하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 뇌의 비판적 사고 부분을 활성화시켜 보세요. 오랜 세월동안 미국에서 미디어가 거짓 선전으로 부패를 조장해 온 것을 생각해 보시고, 7000마일 떨어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지에 영향을 주기 위해 적들이 작업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며 이 길을 계속 가세요.

 

우리는 종말과 이스라엘 및 유대인에 대한 전 세계적인 증오와 박해의 증가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뿌리(즉, 이스라엘)를 비방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이루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과 우리가 접붙여진 뿌리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어머니와 저는 박해가 다가오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이는 기독교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닥칠 것이지만, 특히 유대인들에게 더 심할 것입니다. 2022년과 2023년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예언적인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내용을 그녀의 책 《변화의 바람을 준비하라 II》에 기록하셨습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 박해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소셜 미디어에서 팔로우를 취소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몇 달간 목격한 것과 같은 폭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체테(사탕수수를 베거나 밀림에서 길을 낼 때 쓰는 긴 칼) 공격, 교회와 회당 안팎에서의 총격, 가게들이 불타버리는 것, 사람들이 휘발유를 뿌리고 불지르는 것, 그리고 훨씬 더 끔찍한 일들입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모든 영화는 다가올 것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항상 트리거링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미디어는 이를 놓고 정보를 조작하고 의도된 방향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박해를 불러옵니다. 미디어는 기독교인, 공화당원, 유대인, 보수주의자들을 악마화하고 우리를 적으로 묘사합니다.

 

오늘,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언론은 이스라엘에 책임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들이 이 사건들을 전쟁 범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일까요, 아니면 하마스가 대중을 조작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언론을 통해 보는 것이 현실일까요. 아니면 기독교인들과 중보기도자들을 이스라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적에게 노출되고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기획된 보도일까요?

절대 잊지 마십시오, 언론은 엘리트의 대변인입니다…  1938년 독일 언론은 폴 괴벨스가 이끌었으며, 그의 직위는 ‘선전 장관’이었고 선전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 전체와 그 너머를 유대인에 반대하도록 선전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선전 장관들이 없었다면, 지난 10년간 목격한 혼란의 대부분은 결코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디어의 선전 활동을 두 주 후에 다룰 것입니다. 그 때까지, 교회가 우리의 뿌리인 이스라엘을 거부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시간을 보내고, 주께서 우리에게 그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2025년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축복과 사랑을 드리며,

 

뤼키 존슨-윌슨